마로 : 어떤 핀끝

아지랑이


이 몸은 마찰을 가할 수 없는 거품 덩어리 같은 것이며,
이 몸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포말 같은 것이며,
이 몸은 뭇 번뇌와 갈애로부터 생겨난 아지랑이 같은 것이며,
이 몸은 알갱이 없는 파초와 같은 것이며,
이 몸은 전도로부터 생겨난 허깨비 같은 것이며,
이 몸은 허망하게 나타난 꿈과 같은 것이며,
이 몸은 인연 따라 생기는 메아리 같은 것이며,
이 몸은 순식간에 변하면서 사라지는 구름 같은 것이며
이 몸은 순간순간 불현듯 소멸되는 번개 같은 것이며,
이 몸은 활동성이 없는 것이 마치 땅과 같은 것이며,
이 몸은 나라는 것이 없음이 마치 물과 같으며,
이 몸은 생기가 없는 것이 마치 불과 같으며,
이 몸은 명이 없는 것이 마치 바람과 같으며,
이 몸은 보특가라가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 <<유마경>>중


모처럼 긴 휴가를 맞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시댁 식구의 초대를 받아 포항에 다녀온 것. 밤바다도 보고, 바닷가에 뜨는 해도 보았다. 높다란 마천루를 끼고 있는 바닷가의 풍경은 참으로 독특한 것이었다. 어촌이 아니라, 도시를 끼고 있는 바닷가라. 앞에는 바다를, 뒤에는 높은 아파트를 두고, 찬 바람 속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그 사이 반가운 이의 전화도 받았다. 빨간 아침 해와, 뜨거운 커피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이의 전화까지. 그리고 내 이어폰에서는 내내 루시드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남편은 대화가 안 되니 이어폰을 빼라고 구박했지만 , 나는 루시드폴의 노래를 내려 놓을 수 없었다. 나의 강장제. 나의 위안, 루시드폴을 어찌 내려 놓겠냐구.

아침해를 보았다는 뿌듯함 속에 따땃한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가족들 모두 경주에 갔다. 맨처음 들른 곳은 불국사다. 평소 종교에 관심이 없는 나는 절에 들러도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법당의 구조보다, 아미타불보다, 마당에 핀 들꽃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겨울이라 찾아 볼 꽃도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 이 날은 처음으로 법당의 구석 구석을 살폈다. 특히 내부 구조에 관심을 두고 보았다. 나로서는 참 놀라운 일이다. ㅎㅎ

법당 안은 마치 우주와 같았다. 내면의 혼돈, 삶의 혼돈을 모두 쏟아 놓으면, 이 안에서 다시 코스모스의 우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 법당의 이름들도 찬찬히 뜯어 읽고 씹어 봤다. 극락전, 대웅전, 비로전.... 무교에 가까운 내가 '신을 모신다'는 의미의 불교에 관심을 둘리 없다. 다만, 법당을 싸고 도는 의미를 뜯어 읽고 씹어 읽으면서, 불교가 가진 정신의 세계에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또 어찌저찌하여 읽게 된 불교 경젼, 유마경의 문구.
물이 되고, 불이 되고, 바람이 되고, 아지랑이가 되고, 땅이 되는 .. 자유로움을 선사해준다.
현실의 무게에 눌려 주눅들지 말고, 현실 위에 서서, 그것들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여유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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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2009/12/27 10:35 Trackback. :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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